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하얼빈... 슬퍼서 아름다운 우리들의 이야기 마지막...
    그냥 자유롭게 2023. 1. 22. 09:36
    728x90
    반응형

    마지막편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재판 과정과 주변 사람들의 이후 이야기를 다루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김훈 선생님, 감사합니다. 

    길게 여운이 남는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토는 사후에 일본에 묻히고 일본 제국주의의 영웅으로 남습니다. 

     

    이토는 사후에 도쿄시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의 묘지에 묻혔다.

     

      1932년에는 이토의 명복을 빌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가 서울 장충단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졌다.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순직한 무관들을 제사하는 자리였다.

     

      박문사 건립 운동은 조선총독부의 제창으로 시작되었고

    조선과 일본에서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조선의 모금 목표는 이십만 엔이었고 이 액수는 각 도에 할당되었다.

    조선 왕궁인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서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았다.

    1973년에 박문사 부지는 삼성 재벌에 매각되었고,

    이 자리에 1979년에 신라호텔이 건립되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박문사의 흔적은 1973년까지 서울에 남아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박문사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조선의 친일매국 세력이

    어떤 의미로 활용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서울시 중구의 장충단 공원은 남산 동북쪽에 자리한 시민공원이다.

    이곳이 공원으로 조성된 시점은 일제강점기로 역사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대한제국 시절에 만든 국가 시설, 제단(祭壇)이었다.

    ‘충성을 장려하기 위한 제단’이라는 뜻을 가진 장충단은 1900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을미사변, 명성황후시해사건 당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한양도성의 남쪽을 방비하는 남소영(南小營) 근처에 조성한 장충단은 순국한 군인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현충원이었다.
    출처 : 뉴스포스트(http://www.newspost.kr)


    1900년에 완공된 장충단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1909년 가을 제사를 끝으로 더는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1910년부터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이 자기 나라에 맞서다 전사한 식민지 군인들을 위한

    제사 시설을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충단 시설들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비석은 뽑히는 등 수난을 겪는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며 순국한 조선군을 제사 지내던 장충단은 훼손된다.

    그 시작은 1909년 11월에 거행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이었다.

    그 후로 일제는 장충단을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사장으로 쓴다. 

    .....공원으로 바뀌며 훼손되기 시작한 장충단은 한 사찰이 들어서며 원래의 목적은 물론 모습까지 크게 달라진다.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불교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단 영역에 세운 것이다.
    사찰 이름의 ‘박문’은 이등박문(伊藤博文), 즉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일자와 같다.

    자료에 따르면 낙성식에 일본 측 인사는 물론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 친일 인사 천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박문사의 설립 목적은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 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1935년 장충단의 모습입니다. 위쪽에 위치한 것이 박문사 사찰건물이고 아래쪽에 경희궁 정문이었던 흥화문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이 ‘정신적 결합’을 이상한 방법으로 실천했다.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을 사용했다.

    그리고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 내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총독부가 의도한 ‘결합’은 식민지 시민의 저항심을 억누르고 과거 흔적을 파괴하는 거였다. 
    출처 : 뉴스포스트(http://www.newspost.kr)

     

    해방이후 박문사는 없어지지만 그 자리에는 정부가 운용하는 영빈관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국세청은 1973년 장충단 공원 부지를 삼성에 매각합니다.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이 우리가 줄 서서 사 먹는 망고 빙수로 유명한 지금의 신라호텔입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검사들은 

    이토의 주살을 정치적인 행위나 조선의 독립과 연결된 무장 투쟁이 아니라 

    그저 무식한 조선의 부랑아들이 벌인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여기는 의견을 재판하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관계에 있어서 말할 필요가 있다면 간추려서 말하라.

    사실관계 이외의 말을 하면 제지시키겠다.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하겠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진술을 제지하고 방청객들을 내보낼 때마다 마나베는 위기를 느꼈다.

    사실관계를 파고들수록 정치성이 드러나고 있었고, 외국 언론들의 관심은 높아졌다.

    마나베는 서둘러서 모든 일을 끝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안중근에 대한 신문은 처음부터 혼란스러웠다.

    안중근은 사실관계를 분명히 진술했지만,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진술에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정치적 신념이 작동하고 있음을 초장부터 알았다.

    안중근의 정치성을 부재하는 것으로 몰고 나갈 수는 없었고,

    그 정치성이 이토의 문명개화주의와 동양 평화 구상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몽매의 소산이라는 것을 신문을 통해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신문은 두 달 이상 계속되었다.

    사실관계에 대한 추궁은 어렵지 않았지만,

    범행 동기의 정치성을 무력화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평화의 문제를 추궁해 들어가면 신문은 토론으로 바뀌었는데,

    검찰관이 범죄자와 논쟁을 할 수는 없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일본의 검사들은 최대한 재판에서 정치적인 색을 지우려 노력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발언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일본 제국주의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국선 변호인은 최후 변론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합니다. 

     

    국선변호인 미즈노水野는

    피고인의 범행은 세계의 대세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며,

    피고인이 일본 같은 문명국에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이러한 오해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토 공의 진정眞情이 피고인에게 스며들지 않았고,

    의붓어머니가 아무리 자애를 베풀어도

    자식이 그 생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은 인지상정이라고 미즈노는 안중근을 변호했다.

     

      넓은 도량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신 이토 공은 자신을 해친 범인에 대해

    극형을 가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피고인을 극형에 처한다면 이토 공은 지하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이고,

    이것은 돌아가신 이토 공을 경모하는 길이 아니라고

    변호인 미즈노는 말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그리고 재판부는 검사들이 원하는대로 1910년 2월14일에 사형을 선고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동양평화론이라는 그의 생각을 남길 시간을 

    재판부에 요구합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만 항소를 포기하자마자 곧 사형 집행일을 결정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은 끝내 완성을 하지 못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당한 3월 26일은 부활절 하루 전이었으며 순종의 생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형수의 시체 처리에 관해서는 소정의 규칙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으나,

    만일 안중근의 시체를 유족에게 넘겨주면 그들의 무분별한 행위로 인해

    안중근의 묘지를 성역화하려는 계획이 실현되지 않으리라고 보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장래를 위해 좋지 않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귀청에서 세심히 고려하시어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관동도독부는 안중근의 시체를 유족에게 내주지 말고

    집행 후 지체 없이 감옥 구내 묘지에 묻으라고

    여순감옥에 공문으로 지시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정당치 않은 죽음에 관여된 관리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신들을 숨기려 합니다.

    자신들이 한 행위가 남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서울의 한 복판에서도 그런 짓이 이뤄졌습니다. 

    정당치 않은 죽음이 남는 것을 두려워하는 작자들의 더러운 행위입니다.

     

    안준생은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입니다.

    큰 아들인 안우생은 이토가 죽은 지 4년 후에 만주에서 12살의 나이로 이웃이 준 독이 든 사탕을 먹고 죽습니다. 

    안준생은 한국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상해에서 잡화점을 운영했으나 이후

    상해가 일본에 의해 점령 당한 후에는 친일파로 변절을 합니다.

     

    1939년 가을에 안준생은 한국에 왔다.

    안준생의 한국 일정은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松澤龍雄와

    촉탁 아이바 기요시相場淸가 동행하면서 안내했고 소노키 스에키園木末喜가 통역했다.

    소노키는 안중근 사건 관련자들의 신문과 재판의 전 과정을 통역했던 인물이다.

     

      1939년 10월 15일 안준생은 총독부 관리들과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위령했다. 안준생은 이 자리에서 ‘이토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고,

    통역 소노키는 기자들에게

    ‘안중근이 처형 직전에 자신의 행위가 오해에서 비롯된 폭거임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안준생은 다음날인 16일, 서울 조선호텔로 찾아가서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 1885~1951를 만났다.

    이토 분키치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농상무성에서 관료로 입신해서 남작의 작위를 받고

    일본광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이토 분키치는 안준생과의 사전 약속 없이 ‘우연히’ 서울에 들른 것으로 언론에 알려졌다.

    안준생은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러 왔다’고 말했고,

    이토 분키치는 ‘함께 지성으로 황도皇道를 보필할 것이기에 개인적인 사죄는 필요없다’고 답했다.

    안준생과 이토 분키치는 17일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분향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이 삼 일간의 ‘박문사 화해극’은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되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안정근은 안중근의 동생으로 여섯 살 연하이다.

    안중근의 거사 직후 안정근은 진남포 경찰서에 연행되어 일 개월간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안정근은 풀려나자마자 여순으로 가서 안중근이 처형될 때까지 옥바라지를 했다.

    안중근이 처형된 후 안정근은 자신의 동생 안공근과 형 안중근의 가족들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안정근은 잡화상을 경영해서 성공했고,

    독립운동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안공근은 안중근의 둘째 동생으로 나이 차이는 열 살이다.

    안공근은 상해에서 구미 공사관의 통역과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안중근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한편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안공근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김구가 기획한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고

    대외적으로 김구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안명근은 안중근의 큰아버지인 안태현安泰鉉의 장남이다.

    안명근은 안중근의 거사에 감화받아서 무장 독립 투쟁의 길로 나섰다.

    안명근은 안중근이 처형당하기 한 달쯤 전인 1910년 2월 21일 뮈텔 주교를 찾아가서

    빌렘 신부를 여순감옥의 안중근에게 보내서 고해성사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뮈텔은 이 요청을 거절했고,

    이날 안명근의 태도가 ‘무례하게 보였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뮈텔 주교는 당시 조선 천주교의 대주교였습니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의사에게 천주교도로써 세례를 내렸습니다. 

    이들은 천주교 사제들로써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살인행위로 판단했습니다.

     

    뮈텔 주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천주교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892년의 약현성당 완공, 1898년의 명동대성당 완공,

    그리고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모두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지도력 아래서 이루어졌다.

     

      뮈텔은 안중근의 정치적, 민족적 대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얼빈의 거사를 교리상의 ‘죄악’으로 단정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안중근이 처형된 후 안명근이 독립군 군사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할 때,

    빌렘 신부는 이 모금 운동을 안명근이 주도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뮈텔 주교에게 이 같은 정보를 편지로 알렸다.

     

      빌렘의 편지는 1911년 1월 11일 명동성당의 뮈텔 주교에게 도착했다.

    이날은 눈이 많이 내려서 서울 전역에 눈이 덮였다.

    뮈텔은 편지를 받은 즉시 눈길을 달려서

    조선 주둔 일본군 헌병 사령관 겸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를 찾아가서 이 정보를 제공했다.

    아카시는 크게 감사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당시 조선의 종교인들 역시 살아남는 것이 급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거기에 외국인으로써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리고 아들 안중생의 삶을 어떻게 해석할지도 우리들 각자의 몫으로 남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으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잡는 용기도 필요한 법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에게는 8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안중근의 거사 이후 팔십 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안중근의 행위를 역사 속에서 정당화하지 않았고 교리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1910년의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2000년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는 대희년을 맞아서 ‘쇄신과 화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하고

    한국 교회가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문건은

    한국 교회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안중근 현양 사업을 선도적으로 전개해왔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지금이 2023년의 1월인데...1910년의 3월이 그리 먼 옜날 일 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1910년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틀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름대로 버둥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또 다른 슬픈 이야기입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

Designed by Tistory.